두려움을 믿음의 항구로 옮기기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하든, 요한일서 4:18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진 제공: 언스플래시, Priscilla Du Preez.
무엇이 당신을 두렵게 하든, 요한일서 4:18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진 제공: 언스플래시, Priscilla Du Preez.

당신을 두렵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거미? 높은 곳? 어머니를 실망하게 하는 것? 

이들은 일반적인 두려움이다. 

때때로 두려움은 우리가 행동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행동하게 하기도 한다. 두려움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두려움은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하고, 혹은 행동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믿음은 두려움을 위치시킬 장소를 제공한다. 

두렵지 않다?

1736년 존 웨슬리는 미국을 향해 선교의 여정을 떠났다. 영국에서 출발해 북미 대륙으로 오던 중, 강한 폭풍이 배를 덮쳤다. 돛이 찢어지고 갑판 아래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영국인들은 (아마 웨슬리 자신도 그랬으리라) 소리를 지르면서 겁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단의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기도하며 찬송을 부르며 평안 가운데 있었다. 

웨슬리는 그의 일기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남겼다:

“시편을 읽으며 그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바닷물이 부딪혀 들어오면서 큰 돛을 박살 냈고, 배를 덮으면서 갑판 사이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큰 깊음이 이미 우리를 삼켜 버린 것만 같았다. 영국인들 사이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독일 사람들은 [모라비안들] 침착하게 계속해서 찬양을 불렀다. 나는 이 일 후에 그중 한 명에게 물었다; ‘두렵지 않았나요?’ 그가 대답했다. ‘아니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내가 재차 물었다: ‘여성들과 아이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나요?’ 그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우리 여성들과 아이들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후 웨슬리는 그들이 폭풍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두려움을 내어 쫓는 사랑

요한일서 4:18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자세히 설명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 구절은 사랑이 우리가 삶에서 느끼는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거미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패 공무원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진리는 우리를 담대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이 진리는 폭풍 중에도 모라비안들이 평안을 유지하게 해주었다. 이들은 다른 승객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해가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그들도 바다에 수장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끔찍한 일이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했다. 

해변에 도착한 뒤, 웨슬리는 어떻게 그 또한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라비안 목사에게 물었다. 스팡겐베르그 목사는 대답 대신 그에게 질문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시나요?” 

이는 웨슬리가 예수님에 관해 알고 있었는지뿐만 아니라, 그가 정말로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지를 묻는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웨슬리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대속적 사랑을 믿고 있었는가? 이 당시 웨슬리는 “아니요”라고 대답해야 할 것처럼 느꼈다. 또한 배에 탑승한 중에 느꼈던 두려움의 반응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모라비안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는 사실을 믿었다. 

두려움을 다루는 믿음

폭풍에 대한 반응의 차이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웨슬리와 다른 영국인들은 마비와 감정의 동요를 겪었다. 그들이 느낀 공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들의 두려움을 믿음의 항구로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지식과 확신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나 오스카 로메로와 같은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위해에 대한 공포 속에서도 의로운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 선교사들도 같은 확신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려는 소망을 품고 위험한 길이나 알지 못하는 상황을 마다하지 않았다. 바로 이 확신이야말로 오늘날의 예언자들이 보복에 대한 두려움 중에도 권력을 향해 진리를 외치게 하는 힘이다. 

이들 모두 두려움을 갖고 있었지만, 믿음으로 두려움을 다룰 수 있었기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가 아닌 사랑의 하나님께 최종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분명 오늘날의 세상에도 우리가 두려워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거미뿐만 아니라, 전염병이나 구조적 인종차별 등이다. 

첫걸음

어떻게 믿음으로 두려움을 다룰 수 있는가? 

기독교 전통은 종종 우리가 찾지 못하는 해답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1736년 웨슬리의 배에 타고 있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두려움의 상황에 찬송을 부르며 시편 말씀을 외웠던 것이다. 혹시 그들은 시편 27편을 함께 낭송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 27:1)

혹은 1876년에 해난 사고에 대한 응답으로 지어진 “내 평생에 가는 길”과 비슷한 찬송을 부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전통에 기대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걷는 길은 이미 이전에 누군가 걸었던 길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이들도 우리가 오늘 걷는 것과 같은 두려움의 어두운 그늘을 걸었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거미든 구조적 인종차별이든 어떤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뜻이라고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한 마음으로 그런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그 같은 것들은 실제 위험한 것들이며, 피하거나(거미) 밟아 없애는 것(인종차별)이 상책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이 두려움을 정박시킬 항구를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즉 믿음이 두려움을 최종 결정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뒤로 밀어 넣는 수단이라는 말이다. 이는 선이 실재하고 이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으며, 하나님의 사랑은 가장 선한 때에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실 것이다. 

라이언 던은 연합감리교회 공보부의 온라인 참여 플랫폼인 Rethink Church 담당 목사입니다. 이메일로 연락하세요. 

이 이야기의 영문 기사는 2020년 10월 28일에 처음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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